[시앙스 앙퓌즈] - 세상의 모든 리뷰 :: 삼위일체 교리 발전사 (3-3) 스탠포드 철학 백과

posted by 사용자 자유로운 목사 2016. 9. 14. 15:20



본 포스팅은 스탠포드 철학백과의 "History of Trinitarian Doctrines"의 번역이다. 항목의 원저자는 뉴욕주립대(프레도니아) 철학 교수인 Dale Tuggy이다.


1부 바로가기:http://science-infuse.tistory.com/390

2부 바로가기:http://science-infuse.tistory.com/392

3-1부 바로가기: http://science-infuse.tistory.com/396

3-2부 바로가기: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1

4부 바로가기: http://science-infuse.tistory.com/409

5부 바로가기: http://science-infuse.tistory.com/410




목차


1. 서론


2. 기독교 성경


2.1. 구약

2.2. 신약


3. 신경들의 발전


3.1. 325년까지

3.1.1 삼위일체와 유일신(The One God in the Trinity)

3.1.2. 테르툴리아누스


3.2. 325-381: 아리우스 논쟁


3.3. 니케아 합의 이전

3.3.1.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3.3.2. 아우구스티누스

3.3.3. 아타나시우스 신경


4. 중세의 삼위일체 이론들


4.1. 토마스 아퀴나스

4.2. 요한 둔스 스코투스


5. 중세 이후





3.3. 니케아 합의 이전


골치 아픈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기간 즈음(Freeman 2008, 91-104; Hanson 1988, 791-823), 즉 제국과 교회의 권력들이 제도적으로 동서방의 종속론자들을 없애는 동안(Wiles 1996, 27–40), 마침내 기독교 주류를 지배한 종류의 삼위일체론자들이 분명한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핸슨(Hanson, 1988)과 에이어스(Ayres, 2004)에 따라 우리는 이 기간을 ‘니케아 합의 이전’(pro-Nicene consensus)이라 부른다. 이 합의는 분열된 동방(헬라어권)과 서방(라틴어권)을 포괄했다. 따라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영향력있는 두 사람, 즉 각각의 문화적, 언어적 측면에 서 있던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요약하려 한다.



3.3.1.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출처: https://academic.logos.com/2013/12/17/studying-trinitarian-agency-and-the-godhead-with-gregory-of-nyssa/)


니사의 그레고리오스(ca. 335–ca. 395)는 카파도기아 교부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외에 또 다른 카파도기아 교부들로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형인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ca. 329–79)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329–89)가 있다. 이러한 세 활동적인 주교들은 삼위일체를 위해 지속적으로 사용될 용어를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그들은 휘포스타시스 혹은 프로소폰 이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셋을 위해(위격을 위해), 우시아(퓌시스와 더불어)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하나를 위해(본질 혹은 실체를 위해) 사용했다.(그들의 생애와 경력 및 기타 저술들에 대해서는 에이어스 2004와 핸슨 1996을 참조하라). 우리는 여기서 간략하게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견해를 보면서 니케아 합의 이전에 대한 여러 핵심적인 것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가 삼위일체를 ‘세 인간’(three human beings)과 비교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Nyssa Answer, 256).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 볼 때,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나머지 카파도기아 두 교부)는 원초적-사회론적 삼위일체론자들(proto-social trinitarians)로 해석되어 왔으며(본문 2.1. 참조), 어떤 두 개의 본성은 두 사람인 것과 같다는 점에서(Plantinga 1986), 세 위격은 동일본질, 즉 호모우시오스의 의식과 행위의 세 주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제안된 세 사람 유비는 거부되었다. 그것은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만의 주장도 아니었고, 그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한 유비 중에 중심 논지도 아니었다(Coakley 1999).


‘아블라비우스에 대한 답변: 우리가 말하는 셋은 삼신이 아니라는 점에 관하여’(An Answer to Ablabius: That We Should Not Think of Saying There are Three Gods)라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편지에서, 그는 그의 어린 수신자 아블라비우스 주교에 의한 반대에 답변했다. 비록 세 사람이 단일한 인성을 공유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세 사람’이라고 부른다. 만약 성부, 성자, 성령이 단일한 신성을 공유한다면, 우리가 왜 그들을 ‘삼신’이라고 부를 수 없겠는가?(Nyssa Answer, 256–7) 경솔한 대답 후에, 그는 논증하기를, 저 두 가지 말하기 방식은 동등하지만 둘 다 부정확하다. 즉, 많은 신들과 많은 사람에 관한 말하기는 ‘언어의 관습적인 오용’을 포함한다 (257). 두 경우에 대하여, 그는 단일성, 즉 공통 본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있음을 논증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신의 본성은 이름이 붙여질 수 없고 따라서 형언할 수 없기에”(259) ‘신성’(godhead)라는 용어는 볼수 있는 신적 활동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성경은 셋 각각 모두의 활동을 묘사한다(260). 이것은 전지한 셋(three seers), 즉 “동일한 활동 안에서 보여지는 세 신”이 있다는 결론을 내지 않는가?(261)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는 아니라고 논증한다.


“사람들의 경우...그들이 동일한 직무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복수로(in plural) 제대로 언급되면서, 각각의 행위를 구별할 수 있다...한편, 신성과 관련하여서, 그것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로 확장되는 모든 활동은...성부에게서 그 기원을 갖고 있으며, 성자를 통해서 발출하며(proceed), 성령에 의해서 그 완성에 도달한다. 물질 세계에서의 각각의 활동은 분열하거나 나뉘지 않는다. 그러나 발생하는 모든 것은...세 위격을 통해서 발생하며, 그것은 분열된 셋이 아니며...우리는 연대적으로, 나뉘지 않으며 상호적으로 자신들의 신적 권응을 행사하는 분들을 삼신이라 할 수 없다...”(261–2; cf. 266, Nyssa On the Holy Trinity)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사고에 의하면, 우리는 각 위격들의 다른 행위를 구별할 수 없다. ‘신성’(deity 혹은 Godhead)은 어떤 분명한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구별되는 세 신성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261-4)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문제점은, ‘사역(work),’ ‘활동(operation),’ ‘행동(action)’과 같은 단어들은 (어떤 사물의 힘의 작용으로서의) 어떤 움직임 혹은 그 움직임의 결과를 가리킬 수 있다는데 있다. 즉, 설계하고 구상하여 건물을 세우는 일련의 활동이 어떤 건축가의 행위(그의 사역, 활동, 행동)라 불릴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느한 사물 혹은 사건은 각기 다른 행위자들에 의한 엄청나게 많은 행위들의 결과일 것이다. 마치 수십명의 인부가 그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의 빌딩을 세우는(즉 빌딩이라는 존재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행위들이 단일한 결과를 낳는다는 주장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즉 결과)가 하나 일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하나가 아니다. 게다가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는 복수의 신적 위격을 주장하며, 그것들이 다르다고 또한 말한다. 신성이 ‘구별될 수 없는데’ 세 위격은 인과적으로(causally) 다르다.  


“어떤 존재(즉 성부)가 출생없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의 존재의 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그 표현에 의해 명확하게 되는 것은 없다.”(267)


따라서, 위격들이 무엇인지 모호한 점이 있지만, 그들간의 구별은 제거되지 않음이 강조되었다. 우주에 대한 플라톤주의자들의 견해처럼, 그는 셋은 한 보편적인 본성(즉, 신성)을 공유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왜 세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264-6) 결국 그의 주된 논의의 목적은 단순히 그에게 내려온 신비로운 전승을 붙드는 것 뿐이었다.(257; cf. Nyssa Great, ch. 1-3). 


니케아 이전의 삼위일체론의 기반은 하나이자 단순한(즉 부분들이나 구성들도 아니며 다른 본질적인 측면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과, 따라서 파악불가능하며(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의 본질적 본성에 대한 진리를 다 알 수 없다) 형언할 수 없음(그것에 적용할 수 있는 인간 개념은 없다)이다. 그래서 에이어스는 논하길, 


“니케아 이전의 논의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줄 하나님과 피조세계 사이의 유비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음과 그러한 유비들은 유비가 실패하는 지점과 이유가 분명한 우리를 포함함을 전제로 한다.” (Ayres 2004, 284)


따라서 모든 제공되는 유비는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보충된다. 반대자들은 유비를 불명료한 것으로 보지만, 지지자들은 서로 다른 유비들이 여러가지 면에서 유익하고 좋은 것이라고 본다. 니케아 이전의 논의들은 위격들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구분되었다고 보는 반면에, 신적 위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의 발전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니케아적인 발화와 사고는 그들에 의해 ‘영적으로는’ 유익한 것일지 몰라도 명료한 고백은 아니었다. 즉 이 견해는 매우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3.3.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6세기 경 익명의 화가에 의해 그려진 프레스코화, 출처: 위키피디아)


단언하건대,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삼위일체론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한 하나님은 곧 삼위일체이다. 그리고 이 한 하나님은 거의 언제나 인칭대명사들을 사용하여 전달되고 묘사된다. 그분은 우리 이웃과 우리 자신만큼이나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분은 자아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즉, 그분은 단순하며, 무시간적이고 완벽한 자아이며, 온전한 지식의 주체이자 자유롭게 모든 것을 창조하며, 보다 더 참되고 심오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참된 신자는 ‘셋으로 된 무엇(즉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벨리우스가 바로 그렇게 말해서 이단이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Augustine, Trinity, 227 [VII.3.9]; cf. City 425 [X.24], 462 [XI.10]) 신자는 ‘세 위격’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것은 세 자아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대작 <삼위일체에 관하여, De Trinitate>는, 후대의 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받았다. 그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속적인 ‘아리우스주의’와 기타 이단들에 저항하기 위해 니케아 이전의 삼위일체론을 수호하며, 이것이 “또한 나의 신앙이자 가톨릭 신앙이다.”라고 고백했다.(70 [I.2.7]). 그는, 성경은 함축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삼위일체를 가르친다고 논증하며,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러한 확장된 명상을 이어간다. 그는 이러한 명상은 이해의 방식으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죄가 우리의 지성을 오염시켰으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는 반드시 내세에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230–2 [VII.4], 430 [XV.6.45], 435 [XV.6.50]). 끝 부분에 가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위대한 삼위일체에 관하여 말한 이 모든 것들...나는 감히 그것들이 상상할수조차 없는 신비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434 [XV.6.50]). 실제로 거의 초반부에 그는 책 전체를,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능력보다 자만심이 더 큰,’ 그리고 ‘그들의 교사들이 보다 심오한 진리를 말하는데 머뭇거리기에, 그 교사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기 위한 책으로 기획한다.(67 [I.1]). 아우구스티누스의 목적은 삼위일체를 이해하여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추구하는데로 인도하기 위한 자그만 파편적인 이해를 전달하는데 있다.(434–7 [XV.6.50-1]). 인간이 이해를 하기 위해 갖춘 능력이 흐릿하기 때문에, 책의 많은 부분이 실제로 삼위일체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지 삼위일체 그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비록 언젠가 훗날이 되어서야 우리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바른 교리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단정적인 소극적 신비주의적인 논조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기초적인 형이상학을 지닌 것처럼 보이며, 또한 그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두드러지게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표준적인 신조적인 용어인 ‘위격’(헬라어 휘포스타시스 혹은 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이 ‘하나님의 셋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 논증한다.(224–30 [VII.3], 241 [VIII.1.1], 398 [XV.1.5])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기에, ’위격’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특정 종(species)를 제공할수 없는 어떤 ‘분류’(genus)를 뜻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적 본질’은 어떤 분류도, 종의 이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용어처럼 어떤 기능을 갖는다. 신적 본질은 공유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숫적으로 하나로 만들어주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Cross 2007).


<삼위일체에 관하여>는 후대의 저자들이 그것을 삼위일체의 ‘심리학적 유비들’이라 부름으로써 유명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만약 우리가 삼위일제에 대한 지적인 표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피조된 영역,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지성)의 가장 고등한 부분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반성, 상상, 흔적들을 볼 수 있다.(Augustine Trinity, 231 [VII.4.12]; Genesis 1:26). 인간 지성에서, 우리는 다양한 ‘삼위성’(trinities)을 만난다. 성부, 성자, 성령에 일치하는 무엇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대상, 사랑받는 대상을 위한 사랑하는 자의 사랑(255 [VIII.5.13])

  • 지성, 지성의 지식, 지성에 대한 사랑(272–5 [IX.1])

  • 지성의 지성 자체에 대한 기억, 지성의 지성 자체에 대한 이해, 지성의 의지 (298–9 [X.4])

  • 기억, 이해, 의지 (374–82 [XIV.2–3)

  • 지성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에 대한 의지 (383–92 [XIV.4–5])

  • 존재,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사랑 (Augustine City, 483-4 [XI.26];cf. Confessions 264-5 [XIII.11])


이러한 것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이미지들’로 여겨지며, 어떤 의미에서 마지막 셋은 가장 정밀한 것이다.(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삼위성, 혹은 삼중의 발출은 삼위일체의 이미지가 될 수 없음도 논한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에 관하여>의 마지막 장(15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추구 가운데 이러한 것이 유용한 관조라고 보았을지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부적당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428 [XV.6.43]). 그 중심적인 이유는, 이러한 셋은 한 인간이 하는 행동들 혹은 인간이 가진 능력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분만의’ 기억, 이해, 의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적 단순성에 대한 교리는, 머릿속 유비들(mental analogies)이 그나마 유용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더 나아가 시간의 과정(temporal processes)은 본질적으로 변할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부적절하게 나타낼 수 밖에 없다.(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나열하는 순간 이미 시간이 지나버리고 순서가 나타난다-역자주)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단순하며 따라서 불변한다고 주장한다. 선하다 혹은 지혜롭다 등과 같은 피조물에게도 우유적으로 서술되는 단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서술이다. 우리들에게 이러한 단어들을 적용함에 있어서, 그것들은 우리가 소유하지 못했다가 소유함으로써 발생한 속성들을 가리키지만, 하나님에게 적용할때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단순한 본질을 가리킨다. ‘아버지’나 ‘아들’과 같은 용어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유적인 속성을 가질 수 없기에, 이러한 단어들은 우유적으로 서술될 수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서술된 것이라 말하기도 원치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단어가 관계적으로 서술되는 것은, 그분의 본질때문도, 우유성때문도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방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서술을 관계적이라는 개념을 탐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거부한다.(Books V-VII). 결국 그는, 어떤 용어들은 세 신적 위격들 각각에 동등하게 적용되지만, 관계적인 용어들은 우선적으로는 셋 중 하나에만 적용된다고 논한다. 요약하자면, 


“이러한 삼위일체는 하나님이다. 삼위일체지만, 단순하다...왜냐하면, 한 위격이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가운데서 회자되는 경우를 제외하고선, 그 소유한 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Augustine City, 462 [XI.10])


삼위일체 및 각 ‘위격’은 오직 하나의 구성 요소, 즉 한 하나님이 되게하는 신적 본질만 갖고 있다. 이 단순한 실체의 단독적 주체가 내적으로 관계 맺는 세 ‘위격들’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그 외적인 관계의 방식들은 신비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그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이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그 교리는 부정적인 신비이다. 


가장 최근의 삼위일체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주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거대한 작품과 상호작용을 시도하며,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생각한다. (본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를 참조하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세의 후계자들 모두는 삼위일체를 ‘세 자아’로 접근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Cross 2012, 26-7).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 보에티우스(ca. 480–525),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와 같은 주요한 중세 철학자-신학자들은 여기서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Marenbon 2003, 66–95; Mann 2004; Brower 2005; Marenbon 2007).



3.3.3. 아타나시우스 신경


소위 아타나시우스 신경은(라틴어 ‘쿠이쿰퀘 불트’[Quicumque vult], 즉 ‘~하기를 원하는 자’라는 시작 문구로 잘 알려진), 이 교리에 대해서 가장 널리 수용되고 사랑받는 정식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며, 6세기 초 익명의 저자의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철학적 논의는 종종 이 신경과 더불어 시작한다. 이것은 니케아 이전의 삼위일체론을 외우기 쉽도록, 그리고 명백하게 역설적인 형식으로 구성된다.


그 일부를 발췌하자면,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무엇보다 가톨릭 믿음(catholic faith)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이 전부와 신성한 것을 수호하지 않는 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원한 멸망에 처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 신앙이다. 우리는  혼합된 위격들이나 나뉘어진 신적 존재가 아닌 삼위 안에 있는 한 하나님, 일치 안에 있는 삼위일체를 예배한다. 성부는 한 위격이며, 성자는 또 다른 위격이고, 성자도 역시 도 다른 위격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은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며 위엄 가운데 영존한다. 성부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성자도, 그리고 성령도 존재한다. (Qualis Pater, talis Filius, talis Spiritus Sanctus.)창조되지 않으며...무한하며...영원히...그리고 세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한 존재가 있다...성부가 전능하다...그러나 세 전능한 존재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한 한 존재가 있다. 따라서, 성부가 하나님이며, 성자가 하나님이며, 성령이 하나님이다. 그러나 세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있으며, 세 주님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주님이 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격이 하나님이자 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처럼, 가톨릭 신앙(catholic religion)은 우리로 하여금, 세 신들, 혹은 세 주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지한다. 성부는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출생하지도 않았다(Pater a nullo est factus: nec creatus, nec genitus).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오직 성부에 의해 출생했다. 성령은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았으나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래한다. 따라서 한 성부가 있지 세 성부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한 성자가 있지 세 성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한 성령이 있지 세 성령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안에서는 다른 위격보다 더 먼저와 나중, 더 크고 작음이 없다(Et in hac Trinitate nihil prius aut posterius, nihil maius aut minus). 그러나 세 위격들은 그 스스로 영존하며 영원히 동등하게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치 안에 있는 삼위일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Anonymous Athanasian-필요에 따라 라틴어 원문을 추가하여 번역하였다-역자주)


나머지 부분을 보면, 다른 것과는 동일시 될 수 없는 삼위일체의 위격의 식별불가능한 정체성이 뒤따른다. 그런데  앞부분을 보면, 최소한 세 영원한(그리고 기타 특성) 존재가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한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논한다. 따라서 이 신경은 모순적으로 보이며,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받아왔다(Biddle 1691, i; Nye 1691a, 11; Priestley 1871, 321). 위의 일관성 없는 논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최근의 삼위일체 이론들의 주요 동기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문제는 있지만, 누구도 어디가 문제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단순하게 이 신경을 거부한다.


출처: http://plato.stanford.edu/entries/trinity/trinity-history.html#Intro





댓글을 달아 주세요